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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

과학적 사유를 일단 보류하고 현상학적 탐구를 준비하자
epoche

  여기 책상 위에 뱀이 한 마리 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뱀의 질량, 외형, 부피, 색상 등을 관찰해 그것이 틀림없이 뱀일 것이라고 쉽게 단정할 것이다. 그러나 신중하고 신중한 후설E. Husserl은 소박한 우리의 ‘자연적 태도naturliche Einstellung’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뱀이라고 확신하고 호들갑 떨었지만 다시 보내 뱀 모양의 장난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뱀 모양의 허리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적 태도는 늘 이렇게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여기서 후설이 제안하는 것이 에포케epoche, 즉 판단중지다. 후설은 이를 현상학적 환원 phanomenologische Reduktio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대답히 성급하고 부정확하다. 이러한 성급함은 대상을 그 자체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객관주의에서 유래한다. 과학자라면 이 뱀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뱀 모양의 물체를 다각적으로 설명해 누구라도 뱀에 대한 진정한 설명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자 한다. 객관적으로 주어진 진실을 밝혀내는 과학이야말로 참된 학문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후설은 이러한 과학적 객관주의를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대상의 본질은 늘 관찰과 실험 너머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점은 자주 깨닫는다. 내가 사실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것이 훗날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때도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 또한 자주 겪는다. 이러한 오류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대상을 일단 괄호로 묶고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좋다. 후설리 주장하는 대로 판단을 중지해보자. 책상 위에 있는 뱀 모양의 물체도 뱀이라고 단정하지 말고, 내가 두드리고 있는 키보드 모양의 물체도 키보드라고 단정하지 말자. 알고 보니 빨래판일 수도 있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도 버리자. 아무리 확실하다고 여겨지더라도 일단 모두 판단을 중단해보자. 그럼 이제 뭐가 남는가? 허무주의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렇게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최후로 남는 무언가는 분명 있다. 그것이 바로 ’ 순수의식 reine Bewu β tsein’이다. 아무리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다 해도 이러한 판단중지를 수행하는 순수의식이라는 주체 자체는 부정하지 못한다. 쉽게 말해 판단중지하는 ‘나’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데카르트다. 참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택한 데카르트가 궁극적으로 부인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사실은 바로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후설 또는 순수의식을 괄호로 묶을 수 없음을, 즉 순수 의식은 판단중지의 대상이 아님을 인정한다. 후설은 이렇게 판단중지를 통해서도 괄호로 묶일 수 없는 순수한 우리 주체의 의식을 명쾌하게 파악하는 것이 현상학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후설은 데카르트와도 다르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반면  후설의 에포케는 전면적 부정이 아닌 잠정적 중지를 의미한다.존재하는 대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의 성급한 선이해先理解,Vor-verstehen와 선판단先判斷,Vor-urteil을 경계할 뿐이다.
  세상은 객관적으로 그렇게 주체의 밖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명쾌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태도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순수의식이 판단중지를 통해 지향함으로써 대상은 우리의 순수의식과 합일된다.
  이런 주관주의는 칸트와 닮았다. 칸트 또한 대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갖춘 선험적a priori 형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칸트가 ‘사물 그 자체物自體,Ding an sich’를 결코 인식할 수 없다고 본 반면 후설은 대상의 본질이 주체와 합일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다르다.